한글창제 논쟁의 끝
한글창제 뒤엔 세종과 사대부들의 토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의 내용에 대해 한두 가지 물으려 한 것인데, 너희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막말을 하니, 그 죄를 벗기 어렵다." 세종이 성질 사나운 군주였다면 아마도 최만리 등은 목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소통을 중시하는 인텔리 군주 세종은 최만리와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석방케 했다. 단 하루짜리 구류에 처해 상징적으로 왕의 권위를 지킨 것이다. 그런데 김문과 정창손에 대해서는 별도의 책임을 물었다. "김문(金汶)은, 지난번에 언문 제작이 불가하지 않다고 하다가 지금은 불가하다 하니, 그 말이 앞뒤가 바뀐 사유를 국문해 아뢰라. 또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반포해도 충신·효자·열녀 무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행실이 타고난 자질로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용렬하고 속된 선비다. 정창손을 파직하라." 그로써 한글창제를 둘러싼 사대논쟁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에서 한자는 본질적으로 지배자의 문자였다. 대다수 백성은 그 어려운 글자를 배워서 써먹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자를 바탕으로 지식을 독점한 중국과 조선의 지배자들은 주자학에 기대어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글이란 본래 어려운 것이며 아무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종과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이 그 믿음을 뒤집어버렸다. 글이란 본래 쉬워야 하며, 아무나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조선일보/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2008.7.10
|
'♬ 살며 생각하며 > 말 . 우리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화기 이래 국어교과서 특별전 (0) | 2008.08.06 |
---|---|
한글 창제의 애민정신 뒤엔 어떤 정치적 목적이? (0) | 2008.07.13 |
엽기적인 우리말 (0) | 2008.07.11 |
한글창제의 부당함 주장한 '발칙한' 상소문 (0) | 2008.06.22 |
뜻도 모르고 자주쓰는 우리말 500가지 (0) | 2008.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