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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생각하며/말 . 우리말

한글창제 논쟁의 끝

by 골든모티브 2008. 7. 13.

한글창제 논쟁의 끝

 

한글창제 뒤엔 세종과 사대부들의 토론 있었다

 

 

한글창제는 한반도의 문명사를 뒤바꾼 대사건이었지만, 정작 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만큼 한글창제 프로젝트는 은밀하게 진행됐다. 세종 스스로도 한글창제로 인한 사대부의 논란을 내심 우려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친 뒤 1443년 12월 30일에는 마침내 훈민정음이 공표된다. 이날 실록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글자가 비록 간단하지만 전환(轉換)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고 전한다.

이듬해 2월 16일. 세종임금은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고, 세자와 다른 왕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한다. 최만리 등 사대부들이 격렬한 반대상소를 올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 불손한 상소문을 본 세종은 심사가 꽤나 뒤틀렸다. 그래서 최만리 등을 불러놓고 '끝장토론'을 벌였다. 세종은 상소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논박을 한다.

"너희는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고 했는데, 이두(吏讀) 또한 음이 다르다. 또 이두나 언문 모두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두는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언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 열변을 토하던 세종은 더욱 격앙되어 말을 잇는다. "너희는 언문을 '새롭고 기이한 기예'라 했는데, 내 늘그막에 책을 벗 삼아 나날을 보낼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겠느냐. 내가 사냥질이나 하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 말은 너무 지나치다. 너희들이 신하로서 내 뜻을 훤히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종의 논박을 한참 듣고 난 최만리 등이 답했다.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오나, 음이나 해석에 따라 어조와 문자가 한자와 서로 떨어지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해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하게 한 것이므로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기이한 기예의 한 가지라 하온 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급하지도 않은 일(언문 번역)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심려되는 것이옵니다."
 

▲ 세종대왕 어진 /조선일보 DB
최만리 등에게는 기본적으로 한자를 제외한 어떤 것도 문자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들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애초부터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다 보니 논쟁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웠다. '잘못된 전제에 의한 오류'를 고집하는 신하들을 보며 세종은 숨이 막혔을 터다. 그래서 세종은 '논쟁의 끝'을 선언한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의 내용에 대해 한두 가지 물으려 한 것인데, 너희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막말을 하니, 그 죄를 벗기 어렵다."

세종이 성질 사나운 군주였다면 아마도 최만리 등은 목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소통을 중시하는 인텔리 군주 세종은 최만리와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석방케 했다. 단 하루짜리 구류에 처해 상징적으로 왕의 권위를 지킨 것이다. 그런데 김문과 정창손에 대해서는 별도의 책임을 물었다. "김문(金汶)은, 지난번에 언문 제작이 불가하지 않다고 하다가 지금은 불가하다 하니, 그 말이 앞뒤가 바뀐 사유를 국문해 아뢰라. 또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반포해도 충신·효자·열녀 무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행실이 타고난 자질로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용렬하고 속된 선비다. 정창손을 파직하라."

그로써 한글창제를 둘러싼 사대논쟁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에서 한자는 본질적으로 지배자의 문자였다. 대다수 백성은 그 어려운 글자를 배워서 써먹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자를 바탕으로 지식을 독점한 중국과 조선의 지배자들은 주자학에 기대어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글이란 본래 어려운 것이며 아무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종과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이 그 믿음을 뒤집어버렸다. 글이란 본래 쉬워야 하며, 아무나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조선일보/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2008.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