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
한글 창제의 애민정신 뒤엔 어떤 정치적 목적이?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려 하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이를 위하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나날이 연습하여 쉽게 쓰고 편안하도록 하고자 함이라.”
훈민정음의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한국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불리는 임금 세종의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이었다. 그가 재위했던 32년 동안 ‘세종의 정치 철학은 인간주의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의 점철’이라고 할 수 있다. 탁월한 학자이며 행정가인 세종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그 많은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실제로는 한글의 창제와 보급 과정에서 큰 곤경에 처했다고 한다. 한글 창제에 찬성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도 강력한 반발을 하고 나섰다. 굳이 새로운 글자가 필요하냐는 지적이 쏟아져 나왔고, 일부 관료의 조직적인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세종이 죽은 이후에는 한글 보급 사업을 주로 맡고 있던 언문청이 폐지됐다. 특히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 글은 한글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와 집현전 일부 학자가 올린 상소문의 일부분이다.
“이제 따로이 언문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함께하니, 이야말로 소합(蘇合)의 향(香)을 버리고 당랑(螂)의 환(丸)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문명의 큰 누(累)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최만리는, 한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문화인으로서 긍지를 스스로 버리는 일일뿐 아니라 후환(後患)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신하들도 다음의 6가지 항목을 들어 세종의 한글창제를 반대했다.
첫째, 중국과의 외교적 문화적 사대 관계로 볼 때 문제점이 있다.
둘째, 새 문자를 만드는 일은 오랑캐들의 일이기에 우리는 한자를 써야 한다.
셋째, 언문의 창제는 한문으로 된 성리학 연구에 손해가 된다.
넷째, 애민정치는 정치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한글 창제 과정이 충분한 논의 없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세자가 이 일에 전념하여 정사에 공백이 생긴다.
이에 세종은 “너희들은 설총이 한 일은 옳게 여기고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게 여기니 어찌 된 일이냐?”라고 반문하면서, 반대 상소를 올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에 자모(子母)가 몇이 있느냐?”라고 반박을 한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세종은 이미 음운학에 상당한 조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그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반대파를 물리치고 세종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글 창제는 극소수의 양반층만이 누렸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 혁명이었다.
하지만 한글 창제의 배후에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훈민정음의 뜻 자체가 ‘백성을 깨우치는 바른 소리’에 있는 만큼, 세종은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최초의 한글 저작물이 ‘용비어천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씨 왕조의 영웅적 내력을 기록한 이 책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용비어천가’뒤에는 불경인 ‘석보상절’과‘월인천강지곡’의 한글판이 붙어 있는데, 백성들에게 친숙한 불교경전을 함께 서비스해 인심을 얻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지식서비스는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또한 ‘용비어천가’에 뒤이어 한글로 간행한 책들이 ‘삼강행실도’, ‘열녀도’, ‘효경’과 같은 책이라는 점을 볼 때, 한글은 불교문화와 불교식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백성들에게 유교식 사고방식과 예절, 문화를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한글 창제는 순수한 애민정신의 발로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들을 보면 신하들의 보고나 상소를 통해 세상물정을 아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간신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려버리면 임금은 세상을 정확히 알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임금의 명령도 신하들을 거쳐서 왜곡된 형태로 백성들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임금에게 알리고자 해도 조정에서는 어려운 한자를 쓰고 있었고, 더불어 한자로 쓰인 글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붙여 놓아도 그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었다.
따라서 쉬운 글자를 만들면 백성들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계층인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신하들이 그토록 훈민정음을 반대했던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쉬운 글자를 통해 백성들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되면, 우매한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관리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기득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글 창제는 왕의 입장에서 피지배계층인 민중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민중의 뜻을 직접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는 수단, 즉 더욱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한글 창제의 이 같은 측면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국정교과서인 고교 국사에는 한글 창제의 또 다른 이유를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 중심 사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자의 창제가 요청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역사적 관점에서 토론해 보자.
훈민정음이 한글 창제의 목적을 표방한 이름이라면,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언문(諺文)이라는 명칭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용하는, 그래서 한자보다 못한 천한 글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굳이 가치 판단을 배제한다면 가장 적합한 말은 ‘국문(國文)’이다. 이처럼 한 문자에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순탄치 못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시가(詩歌)와 각종 경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에 보급됐는데, 여성층과 일반 서민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나라에서는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번역하였다. 또한, 서리를 뽑는 잡과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고 행정 실무에 이용하게 하였다.
50여 년이 지난 연산군 때 언문(한글)으로 연산군을 비방하는 글이 나붙기도 하였고, 100여 년이 지난 선조 무렵에는 언문 교지와 영비(한글로 쓰인 가장 오래된 비석)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는 훈민정음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양반들은 여전히 한자만을 사용하였고,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천시했다. 세종의 주장은 강했지만, 여전히 향리들은 예전처럼 이두를 사용해 공문서를 작성했다. 훈민정음은 단지 부녀자층을 통해서만 활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글을 여자들이 사용하는 글, ‘암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숙종은 한글로 올라온 상소문을 읽지 못해 한문으로 번역시킨 뒤에야 읽는 경우까지 있었지만, 백성들은 한글을 자신들의 정치적, 문화적 욕구를 대변하는 데 요긴하게 썼다.
이처럼 국가의 정책으로 선포된 훈민정음이 한자에 비해 차등적인 문자라는 언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문화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정치적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라는 우리의 말과 글이 근현대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한글로 그 역사적인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한자 문명인 중국이 쇠퇴하고 더불어 한반도가 일제의 침략 앞에 놓이게 된 시점에서야 가능했다.
즉 조선조 후기 중국으로부터 천주교(서학)를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다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개신 기독교의 전래를 이어받은 한국 기독교 사회는 구한말 이후 성경 보급을 위해 한글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에 한글 보급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한글 창제 이후 가장 획기적인 한글보급운동의 하나로, 바야흐로 한자 영향으로부터 실질적인 자주적 한글언어의 대중적 실용화에 크게 기여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한국 역사에 미친 가장 커다란 공헌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동아일보,2008.3.17 /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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