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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소설 작가

40대 여성 소설가 7인의 각기 다른 문단 데뷔기

by 골든모티브 2008. 2. 8.

2006년 한해를 휘어잡은 40대 여성 소설가 7인의 각기 다른 문단 데뷔기

 

이혜경·은희경·김인숙·신경숙·정미경·공지영·전경린

 

여전히 대한민국 문단의 중심에는 40대 여성 소설가들이 있다. 앞서 열거한 일곱 명 외에도

김혜경, 강영숙, 공선옥, 서하진, 함정임 등 그 세대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다. 작가를 꿈꾸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즐비하니까.


2006년을 국내 40대 여성 문인들 ‘부활의 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1990년대를 장악했던 여성 문인들이 오랜 슬럼프를 극복하고 눈부신 활약을 펼친 것이다.

 

소설부문 3대 문학상이라 불리는 동인문학상(이혜경의 ‘틈새’), 대산문학상(김인숙의 ‘그 여자의 자서전’), 이산문학상(은희경 ‘비밀과 거짓말’)뿐 아니라, 오영수문학상(신경숙 ‘성문 앞 보리수’), 이상문학상(정미경 ‘밤이여 나뉘어라’), 한국일보문학상(강영숙 ‘리나’) 수상자까지 모두 40대 여성 작가들 이름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공지영은 9월부터 11월까지 서점가 전체 베스트셀러 1위를 지켰고, 전경린도 드라마 ‘황진이’ 열풍을 타고 2년 전에 발표한 소설 ‘황진이’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40대 여성 작가 전성시대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이들처럼 살아야 한다’

 

‘동인문학상 ‘틈새’
{1} 이혜경
‘진지한 글쓰기로 한국문학을 살찌우는 작가’

 

어떤 스타일인가? 이혜경에게 배워야 할 것은 기자를 무색하게 만드는 취재력이다. 관찰력이 뛰어난데다 취재력까지 엄청나서,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내 등장인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전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글을 쓰다 보니 구성도 매우 뛰어나다.   
언제 등단했나? 1982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중편 ‘우리들의 떨켜’로 등단. 그 전에 1981년 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투고했다가 최종심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당시 심사평은 ‘주제의식이 뭉개져 있다’였다. 이런 냉혹한 비평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지만, 이내 글을 치열하게 쓸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다. 
등단 준비는 어떻게 했나? 습작기라고 따로 말할 만한 시기를 제대로 안 거쳤다. 대학시절,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써본 소설로 덜컥 등단했다. 제대로 동작연습도 못한 채 링에 오른 복서의 막막함. 결국 그 뒤로 두 편을 더 쓰고 나서 링을 벗어났다. 그런 뒤 직장생활을 하는 틈틈이 손바닥만한 수첩에 일상에서 보고 들은 것 가운데 인상 깊은 것들을 적어 넣곤 했다. 이 기록이 나중에 소설이 될지 어떨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마음에 와 닿는 사소한 일들, 거리의 풍경, 사람들이 한 말 가운데 마음을 긋고 지나는 말 등을 적는 습관이 있었다. 재등단하는 심정으로 첫 장편을 쓸 때 그 수첩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0년 충남 보령 출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를 꿈꿨고, 일생 동안 장편 세 편쯤, 소설집 세 권가량 쓰고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표를 채우고도 남았다. 이혜경은 신중한 사람이다. 이런 점잖은 성품은 양반 마을 충남 보령에서 그것도 8남매 중 막내로 엄하게 자라면서 형성됐다. 이혜경의 문장은 너무 고풍스러워서 선배 작가들에게서조차 “문장이 부럽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감각적인 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혜경 같은 작가는 보석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주요 작품 길 위의 집(1995) / 그 집앞(1998) / 꽃그늘 아래(2001) / 가족(2005) / 틈새(2006) / 피아간(2006)

 

‘이산문학상 ‘비밀과 거짓말’
{2}은희경
‘소설을 통해 나를 이야기하고 나를 찾는다’

 

어떤 스타일인가?  소설 속에서 항상 ‘나’를 찾는다. 규정된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찾다 보니 화자가 혼란스런 경우가 많다. 등장인물이 혼란스런 경우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은희경은 동시대 여성들 마음을 잘 그린 덕분에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다. 은희경 소설이 갖고 있는 매력 중 하나는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이다.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해서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이 무엇인지를 안다. 물론 그렇다고 글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관계 설정이 복잡하고 오묘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끝까지 소통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론까지 말하고 싶어한다.  
언제 당선됐나?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됐다. 전경린과 함께 공동 수상이었다. 당시 35세였고, 아이 둘을 키우는 맞벌이 주부였다.
등단 준비는 어떻게 했나? 하고 싶은 일은 언제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며 노트북을 10만원에 임차해 시골로 내려갔다. 한달 동안 단편 5편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후 다시 한달 만에 쓴 중편이 ‘이중주’였다. 요컨대 습작기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 두 달인 셈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단기집중형’ 정도일까? 시골 쪽방에서 글을 쓸 때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3일 만에 입냄새만 얻고 되돌아올 것”이라는 측근들의 조롱 때문에 억지로 참은 순간도 있었다. 달력 속의 날짜를 지워가듯 종일 구부린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렸고, 저녁때 의자에서 일어나면 다리에 힘이 없어 자빠질 때도 있었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59년 전북 고창 출신. 은희경은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간은  아주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고등학교, 출판사, 잡지사, 출판 컨설팅 등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며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았다. 30대 중반까지 바쁘게 내달렸는데, 어느 날 문득 ‘어쩐지 이게 다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일었다. 은희경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은희경에겐 제도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만도 너무 멋진 시간들이었다. 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주요 작품 새의 선물(1995) / 타인에게 말걸기(1997) / 마이너리그(2001)

 


‘대산문학상 ‘그 여자의 자서전’
{3}김인숙
‘잘 쓰려 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라’


어떤 스타일인가?  김인숙 작품을 꾸준히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등단한 탓이기도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작품에 많이 그렸다. 그래서 발표한 작품마다 그녀의 현재 위치를 알게 된다. 그는 작가가 된 이후 민주화운동에 심취했고, 사랑을 알았으며,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 딸을 키우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문학적으로나 삶에서 성숙한 이후 작품을 데뷔한 작가들과는 성격이 다르고, 동시대를 읽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김인숙은 덜 성숙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의미를 파생시킬 줄 아는 작가다. 
언제 등단했나?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당시 나이가 우리 나이로 따져도 스물한 살이었고, 학년으로 따져도 대학교 3학년이 되던 해였다.
등단 준비는 어떻게 했나? 그는 공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등단 준비도 공부하듯 했다. 신춘문예 당선작 작품집을 사서 마치 모범답안을 미리 외우듯 읽은 뒤 단편을 쓴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선작 ‘상실의 계절’은 문학적 깊이보다 기교가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전광용 씨가 “통속작가가 될 소지가 많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뽑았으니 열심히 하라”고 김인숙에게 정중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후 김인숙은 통속작가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는 문학적으로 성숙한 작가가 되었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3년 서울 갈현동 출신. 방송국 프로듀서가 되려고 했고,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만 나가면 상을 타던 몸의 기억이 그를 문학으로 인도했다. 사실 방송국 프로듀서를 하기엔 그녀의 지난 삶이 너무 문학적이다. 네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량이었고, 하숙집을 하며 오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고생을 업으로 삼고 살았으니 예술가적 콤플렉스는 어려서 이미 만들어졌고, 하숙집에서 자란 사춘기는 그녀의 감수성에 많은 상상력과 여유로움을 만들어주었다.

 

주요 작품 불행연습(1983) / 적외선의 비밀(1983) / 미명(未明)(1983) / 추로여수(秋路餘愁)(1987) / 침묵의 뼈(1988) / 강(1988) / 함께 걷는 길(1988) / 산중유정(山中有情)(1988) / 성조기 앞에 다시 서다(1988) / 구경꾼(1989) / 가까운 불빛(1989) / 부정(不正)(1989) / 칼날과 사랑(1993) / 먼길(1995) / 나비의 춤(1996) / 그늘 깊은 곳(1997) / 거울에 관한 이야기(1997) / 사랑의 예감(1997)  / 유리구두(1998) / 꽃의 기억(1999) /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2001) / 우연(2002) / 그래서 너를 안는다(2003) / 감옥의 뜰(2005) /  교실돋보기(2005) / 그 여자의 자서전(2005)  /  봉지(2006)

 

 

‘오영수문학상 ‘성문 앞 보리수’’
{4}신경숙
‘글은 절박하게 매달려야 하는 것’

 

어떤 스타일인가?  신경숙이 작가로서 주는 미덕은 그 가슴 절절한 표현과 문체만은 아니다. 절박한 글쓰기. 미련하리만큼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의 삶은, 1980년대를 작가로 살아가면서 실천적인 소설 한 편 쓰지 못했다고 타박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요즘 10대, 20대 중에서 그의 젊은 시절만큼 글에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작가가 되기 전에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 신경숙에게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언제 등단했나?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중편소설 ‘겨울 우화’가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내 전업작가로 나설 여건이 못 돼 5년간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구성작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곧 서른이 되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게 허전해. 나 1년만 용돈 줄래? 내가 쓰고 싶은 소설 맘껏 써보고 다시 일하러 가면 안 될까?”라고 약사인 동생에게 도움을 청했고, 부탁을 받아들인 동생 덕분에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동안 ‘풍금이 있던 자리’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등 대여섯 편을 썼다.
등단 준비는 어떻게 했나? 문예창작과에서 2년간 소설 쓰기를 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00권짜리 삼성출판사 한국문학전집을 수차례나 읽었고, 또 시간이 날 때마다 베껴 썼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신경숙의 습작기는 스스로 습작기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시작되었다.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에 중학교 시절 한 친구에게 상처까지 받고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받은 상처란… 같은 반 친구에게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어렵게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반 아이들에게 너무 싶게 비밀을 말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더 이상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글에 매달린 것이다.
“나의 내밀한 욕망들을 기록해가는 사이, 노트 안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노트 안에서는 가능했고, 타자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오해만 일으키는 감정들이 미화작용을 일으키며 풍성한 밭을 일구고 있었다. 남자 형제 많은 집안에서 사는 동안 무수히 침범당한 나 개인의 일상이 노트 안에서는 무한대로 자유로웠다. 나는 그 자유 때문에 점점 노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나쳐 무엇이든 다 문장으로 바꿔보려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는 문장을 쓰는 것 자체를 즐겨 시나 소설을 노트에 빼곡하게 옮겨 적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이상문학상 ‘밤이여 나뉘어라’
{5}정미경
‘소설의 묘미는 치밀한 묘사와 구체성이다’


어떤 작가인가? 소설가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 2001년이니, 그의 나이 마흔두 살의 일이었다. 세월이 어찌되건 간에 글을 쓰겠다는 열망이 살아 있었으니, 언제고 빛을 보긴 볼 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2년에는 ‘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언론에선 감성과 지성, 내면과 서사의 반목을 훌륭하게 통합해냈다며 연일 찬사를 보냈고, 문단에선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새로운 물꼬가 터졌다며 흥분했다. 더 이상 그녀의 늦은 소설가 데뷔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어졌다.
언제 등단했나? 처음 등단한 것은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였고, 당시엔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었다. 이후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2001년 ‘비소 여인’으로 ‘세계의 문학’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다. 치밀한 묘사는 그를 따를 작가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습작기는 어떻게 보냈나? 책은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껏 한시도 손에서 뗀 적이 없었다. 대학시절에는 이대문학상과 고대문학상을 받는 등 글재주도 뛰어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지만 글은 틈틈이 썼다. 그러나 습작기라고 특별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아마도 소설로 등단하기 1년 전 정도. 집 근처에 반지하 작업실을 구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내려가 소설을 썼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0년 경남 마산 출생. 소설가로 활동한 지는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2006년에 둘째 아들이 수능을 쳤으니 연륜도 상당하고 인생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남편 김병종 화백에 대한 열망도 소설 쓰기의 한 이유가 되었다. 언제고 남편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 이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남편처럼 근사한 작업실에서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집 지하실을 개조해 만든 작업실에서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글을 썼다. 처음에는 글을 쓰는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게 명백하게 좁혀졌다. 스스로를 위해 그 고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된 것이다. 마흔이 다 돼서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대로 삶이 무뎌져서는 안 된다고, 생을 끌어가야 할 자신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자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주요 작품 비소 여인(2001) / 장밋빛 인생(2002) / 나의 피투성이 여인(2004) / 무언가(2005) /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2005) / 밤이여 나뉘어라(2006) /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2006)

 


‘2006년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6}공지영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왜 공지영인가? 문학상 수상자는 아니지만, 2006년 출판계 최고의 바람을 일으킨 작가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래 평단과는 척을 진 사이로, 상복과도 거리가 먼 작가다. 공지영은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상업소설가’라고 평가절하하는 데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본인 스스로 “문학상을 많이 받지만 안 팔리는 소설을 쓸 거냐, 문학상은 못 받지만 잘 팔리는 소설을 쓸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잘 팔리는 소설을 쓰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평단의 평가야 어찌 됐든 2006년은 ‘공지영의 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활약이 눈부셨다.
지난해 4월에 출간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80만 부 가까이 팔렸다. 21세 이후 국내 소설이 100만 부에 육박하는 판매 실적을 올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지난해 9월부터 연말까지 10주 가까이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5월엔 신작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지난해 연말 발표한 장편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그리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세 권이 베스트셀러 순위 10위 안에 드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언제 등단했나? 1988년 ‘창작과 비평’에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등단. 그후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1993년 발표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였다.
습작기를 어떻게 보냈나? 등단을 위해 준비를 했다기보다 1987년 구로공단 근처의 전자부품 제조업체에 취업했다가 입사 한달 만에 프락치에게 걸려 강제 퇴사당하고, 같은 해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구로구 개표소 부정개표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일주일 동안 구류를 산 후에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소설이 ‘동트는 새벽’이다. 처음부터 문학을 위한 문학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3년 서울 태생. 글쓰기… 그 이상을 꿈꾸는 사람, 공지영만큼 욕심 많고 당찬 작가도 없다. 국내 작가들은 대부분 자기 삶에 대해 소극적이고 폐쇄적인데 반해, 공지영은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도 농담처럼 할 정도로. 사춘기 시절에는 혼자 시와 소설을 써서 문집을 만들기도 했으며, 무작정 출판사를 찾아가 출간을 조르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정적이던 ‘동조파’였고, 졸업 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에서 일했다. 출판사를 거쳐 1986년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지루한 강의에 일찌감치 싫증을 느끼고 창작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주요 작품 동트는 새벽(1990) / 손님(1990) /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1991) /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1991)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 / 인간에 대한 예의(1994) / 미미의 일기(1994) / 고등어(1994) / 광기의 역사(1995) / 착한 여자(1997) /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1997) / 봉순이 언니(1998) /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2001) / 섬-베를린 사람들(2003)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 /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05)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내는 황진이 같은 작가
{7}전경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그만큼 화려하게 데뷔전을 치른 작가도 없다. 등단 이듬해인 1996년 단편 ‘염소를 모는 여자’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더니, 다음해엔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문학동네소설상을, 그 다음해엔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문학상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10년 이상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도 그밖에는 없다. 1995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은 장편소설과 소설집, 산문집까지 포함하면 모두 12권이다. 매년 장편 하나씩은 쓴 셈이다. 늦은 나이에 데뷔했다는 조급함과 글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전경린의 미덕은 바로 쉼없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작품을 갈고 닦아서 완성도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끊임없이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왜 전경린인가? 글쓰는 능력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 어떤 작가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필력이 대단하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정말 잘 쓴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언제 등단했는가? ‘사막의 달’이란 작품이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은희경과 공동 수상했다. 
무엇이 문학으로 이끌었나? 1962년 경남 함안 출생이다.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대학까지 마산에서 다니는 탓에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지방 방송국 프로듀서와 작가로 일하기도 했지만, 작가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다. 일찍 결혼을 했으며, 줄곧 마산에서 살았다. 1992년의 어느 날, 소설가 김웅이 창원에서 주부들을 위한 문학강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등록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전경린은 그 기회가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나 되는 듯 열정을 다해 글을 썼다.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할 때까지 읽는 독서 습관도 가지고 있었다.
습작기를 어떻게 보냈나? 1993년 가족이 진양이라는 마산 근처의 시골로 이사했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글을 써냈다. 어떤 때는 글이 속에서 흘러넘치는 바람에 종이에 쓰지도 못하고 녹음기를 켜놓은 채 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소설 쓰기에 전념한 세월이었다.

 

주요 작품 염소를 모는 여자(1996)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1997) / 여자는 어디서 오는가(1998) / 내 생에 꼭 하나뿐일 아주 특별한 날(1999)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2001) / 바닷가 마지막 집(2003) / 물의 정거장(2003) / 황진이(2004)

 

 조선일보,2008,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