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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밖 언어여행/베스트셀러

80년대 베스트셀러 시집

by 골든모티브 2012. 2. 8.

베스트셀러 시집 - 베스트셀러 30년(한기호)

 

1980년대 밀리언셀러 시집 - 이해인, 도종환, 서정윤시인 등

<접시꽃 당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홀로서기> 등

 

1985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이해인, 분도출판사, 1983년)

1985년은 이해인 수녀의 해였다. 두 해 전 출간한 세 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가 연말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79년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 각각 3, 4위를 기록했다. 혼자서 2∼4위를 그것도 시집으로 싹쓸이한 것. 수녀 이전까지 시집은 좀처럼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
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 채널로, 그 어느 때보다 시가 뜨겁게 쓰이고 읽혔지만 역시 판매 면에서는 소수의 전유물에 그쳤다. 하지만 수녀는 한용운을 연상시키는 구도자적인 시풍, 쉽고 정갈한 시어 등으로 단번에 한국 출판사를 새롭게 썼다. 시는 딱히 누구에게 읽히겠다는 생각 없이 써둔 것들이었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홍윤숙 시인이 “혼자서 보기 아깝다”며 나서 『민들레의 영토』가 나왔다. 한창 주가가 높던 때는 한 잡지사가 수녀의 인터뷰를 과제로 요구해 수험생들이 수녀원 담을 넘는 일까지 벌어졌다. 수녀의 시집은 모두 500만 부 넘게 팔렸다.

1986년
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 1986년)

86년 말 출간돼 두 달 만에 10만 부가 팔리며 그 해 베스트셀러 20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87년에는 종합 2위, 88년에는 종합 3위를 기록하며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와 함께 80년대 중·후반, 시집 베스트셀러 시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 꽃다운 나이의 아내를 병마로 잃은 젊은 남편이 무덤을 돌보며 쓴 시라는 가슴 먹먹한 순애보가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호응이 일었다. TV 드라마·연극은 물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는 이덕화·이보희가 출연했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부수는 120만 부. 출간 당시 형편이 어렵던 출판사가 순전히 『접시꽃…』 덕분에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지금도 농담처럼 회자된다. 독자들은 순애보로 받아들였지만 도씨의 시적 지향은 오히려 민중시 쪽에 가깝다. 도씨는 시 내용이 문제가 돼 조사를 받은 끝에 시골 학교로 좌천되기도 했다. 시집은 지금도 팔린다. 해마다 5000부 넘게 나간다. 출판사는 시집 출간 25주년을 맞아 시인과 관계가 막역한 판화가 이철수씨의 작품을 곁들인 특별판을 지난달 발간했다.

1987년
홀로서기(서정윤, 청하, 1987년)

‘기다림은/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좋다./가슴이 아프면/아픈 채로,/바람이 불면/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아득한 미소’. 이와 같이 시작하는 시인 서정윤씨의 시 ‘홀로서기’는 이해인·도종환의 시편과 함께 80년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그에 따른 파급효과도 컸다. 81년 영남대 교지에 처음 발표된 시가 시집 『홀로서기』에 묶이기 전부터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며 인기를 얻은 사연은 유명하다. 시집은 87, 88년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4편까지 속편 시집이 만들어져 모두 300만 부 넘게 팔렸다. 시 낭송 음반이 제작되고, 90년대 중반까지 좋아하는 시집 순위 상위에 랭크됐다. 『홀로서기』를 포함해 시집에서 베스트셀러가 잇따라 나오자 『마지막이라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같은 감각적인 제목으로 무장한 ‘아류 시집’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정작 서씨는 90년대 들어 시집 『나를 찾아 떠난 길』 등을 내며 시적 변신을 꾀하고, 장편소설 『오후 두 시의 붓꽃』 등을 내기도 했다.

1989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칼릴 지브란, 진선, 1988년)

레바논 출신의 시인·화가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1883∼1931). 그가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매리 해스켈과 주고 받았던 사랑 편지 중 아름다운 구절을 발췌해 시집처럼 꾸민 책이다. 88년 출간돼 종합 19위에 오른 뒤 89, 90년 7위, 91년 17위를 기록하며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 독자들의 손을 타며 20만 부가 팔렸다. 지브란은 70년대 중반부터 우리 독서계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10대 후반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쫓기듯이 이주했으나 암·결핵 등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차례로 잃고 타향 땅에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린 그의 신산스러운 삶,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궈낸 사랑·결혼·우정·죽음·종교·선악 등에 대한 주옥 같은 성찰이 담긴 글은 당시 한국인의 가난한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지브란은 함석헌 선생이 그의 대표작인 『예언자』를 번역해 70년대 초반 조금씩 소개하면서 한국 독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75년 시인 강은교씨의 번역으로 문예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창작과비평사, 1994년)

94년 봄 출간 후 8개월 만에 40만 부가 팔려나갔다. 그 몇 해 전 출판사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한 차례 돌려보냈던 원고를 다시 받아 손본 다음 출간했다. ‘어느 놈하고였더라/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슬픈 카페의 노래’), ‘아아 컴-퓨-터와 X만 할 수 있다면’(‘Personal Computer’) 등. 시집에 담긴 수위 높은 도발적 언어는 남성 독자는 물론 여성 독자들에게도 금기를 내팽개치는 해방감, 그를 통한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사회변혁의 전망이 사라진 90년대, 80년대의 상처와 고통을 정직하게 토해낸 의미 있는 기록이라는 찬사가 있었던 반면, 이른바 후일담 문학으로 치부하는 비판적 시선도 있었다. 특히 출판사 창비가 시류에 편승해 운동을 팔아먹는다는 날 선 주장의 ‘물증’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최씨는 2005년 시집 『돼지들에게』를 통해 ‘시적 도발’의 수위를 한층 높인 바 있다.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하며 특정인을 ‘시의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해 논란을 불렀다.

1997년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류시화, 열림원, 1996년)

위환위기를 코앞에 둔 불안감, 팍팍한 세상살이의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97년은 시인 안재찬, 즉 류시화의 해였다.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는 알기 쉽고 차분한 언어로 주변을 한번쯤 둘러보게 만드는 그의 명상적인 문장은 감염력이 높았다. 번역서든 시집이든 산문집이든 그가 손대기만 하면 성공했다. 한 해 전 가을 출간된 류씨의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는 97년 5위, 98년 17위를 기록했다. 99년 초까지 70만 부가 팔렸다. 이런 성적표는 아무래도 100만 부가 넘게 팔린 91년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의 영향력도 작용한 탓일 게다. 정작 97년 류시화의 최대 성공작은 따로 있었다. 미국 작가 잭 캔필드 등이 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그가 기획하고 번역까지 했다. 3권까지 출간된 시리즈는 모두 30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잇따른 ‘대박’으로 류시화는 인세 수입이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라는 얘기도 돌았다. 2005년에는 시집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 6위에 오르기도 했다.

newsclip@joongang.co.kr / 201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