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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시대의 옆 모습을 찰칵 포착한 시집들

by 골든모티브 2008. 5. 3.

시대의 옆 모습을 찰칵 포착한 시집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유치환의 ‘행복’중에서>

만년필로 쓱쓱 거리며 백지위에 내 마음을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가던 그 때. 시인은 에머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옆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고교시절 첫 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에 인용했던 구절입니다.

한때 왜소해지던 시가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실용과 합리주의만으로 세상이 판정되고 재단되지 않지요. 작고 외롭고 사소한 것들은 시의 그물에 걸립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시집 코너는 북적이는 실용서 코너보다는 한적하지만 시집을 펼쳐보는 손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서가에 켜켜이 누워있는 하얀 시집들은 밤새 뒤척거리며 홀로 제 詩들을 쓰다듬습니다. 시는 모국어의 결정체입니다. 시는 시인이 헤아릴 수 없는 사념을 축적해 건져 올린 진실 꾸러미입니다. 시인의 언어 조탁 행위를 통해 한글은 빛나고 우리말은 감동의 매개체가 됩니다.

편집자로서 늘 시를 통해 언어의 정갈함을 배웁니다. 쏟아지는 말 성찬보다 단아한 한마디 문장의 힘을 믿습니다. 시인은 동서고금을 가로 지르며 인간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표현합니다. 신문 편집자는 뉴스저널리즘 속에서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명명합니다. 편집자는 늘 시인을 좇습니다. 시인이 옹색해지는 시대엔 편집자도 궁색해집니다. 시인과 편집자는‘언어의 조탁’이란 우정을 두르고 때때로 어깨동무합니다. 둘 사이 무미건조함을 싫어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요 일간지들이 시 코너를 일부러 챙겨준다 해도, 주말 북섹션 시집 소개는 점점 드물어 갑니다. 출판계에선 시집 출간을 상업적 성공이 어려운 장르라고 봅니다. 인터넷이 사회적 소통의 기본도구가 되었습니다. 문학의 영역은 점점 더 엷어지거나 경박해지고 있습니다. 신문 잡지를 막론하고 인쇄 미디어는 막강했던 영향력과 파급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꿈을 버리지 않듯이 그 꿈을 낚는 '언어의 그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 겉핥기 정보는 철철 넘치지만 그 골조를 이루는 언어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메말라갑니다. 시는 인간의 꿈을 언어로 그려내고 새깁니다. 가슴이 휑해지면 시집을 펼쳐볼까요.

 

우리들의 마음을 울렸던 유명 시집 타이틀에 대해 말씀드려볼께요.

#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 최영미 시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

최영미 시인의 1994년 출간 첫 시집 타이틀‘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신문 편집자들이 꽤나 자주 인용하고 패러디하는 대상입니다. 시집에서 소개되는 70~80편의 시들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시를 추려내 표제시로 삼습니다. 표제시가 시집 타이틀이 됩니다. 시대의 잔치는 정말 성료됐는가. 잔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잔치상을 누린 사람은 누구고 잔치상 설거지는 누가 하는가... 보기 드물게 시집은 왕대박을 터뜨립니다. 서른이 되려는 사람, 서른을 훨씬 지난 사람들도 애독했습니다. 운동권 담론이 후일담 문학으로 변주되던 시기. 최시인의 시집은 수많은 詩 평론가들의 논쟁적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시집의 반열에 건재합니다.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시인의 ‘섬’전문 >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정현종시인의 가장 짧은 시입니다. 1991년에 출간된 시집 제목은 바로 이 짧은 시의 첫 문장을 따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이 문장은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쉽게 설파한 절창입니다. 세인들은 정 시인의 수백편 시 중에서 정 시인을 연상하는 핵심 이미지로 이 타이틀을 떠올립니다.

#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 정희성 시인 ‘저문 강에 삽을 씻고’중에서 >

정희성 시인이 1978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제목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입니다. 가히 시집 제목으로는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명 타이틀로 평가됩니다. 묵묵한 노동. 하루의 저묾과 '삽자루에 맡긴' 인생의 저묾. 인간에 의해 썩어 가는 샛강에 비친 달. 정치적 독재가 횡행했던 개발연대 도시빈민의 열악한 상황을 극명하게 암시했습니다. 고단한 노동의 삶이 여덟 글자로 압축된 탁월한 타이틀입니다. 한편 1991년에 출간한 정시인의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도 시적 감흥이 절절한 좋은 시집 제목입니다.

#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안타깝게 바라볼 것이다.
< 황지우 시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중에서>

황지우시인의 1998년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도 독자들에게 가장 감정 전이가 잘되는 작품을 시집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살찐 소파처럼 부풀어가는 육체. 되돌아볼수록 깊어가는 생의 회한. 슬픔과 연민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삶의 후반기 진입. 삶의 주름이 겹겹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는 푸석한 중년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황시인의 이 표제시 덕분인지 저는 날씨가 꾸물거리거나 비가 내리면 광화문 언저리 빈대떡집에서 탁주 한 사발을 꼭 들이키고 싶답니다.

황시인의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도 군사정권이 빚어내는 폭압적 정치 현실을 역설적으로 풍자한 시 제목으로 인상 깊습니다. 전체주의적 분위기속 무기력한 현실에서 차라리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이륙하는 새떼들에 감정 이입 되어 당시의 절박한 시심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소심함도 그대로 묻어납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 시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중에서>

#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기형도 시인 ‘입 속의 검은 잎’중에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명명합니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 시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입니다. 만 스물아홉 살 생일을 앞두고 요절한 시인의 유일한 시집은 해마다 새로 찍는 전설적 시집이 되었습니다.‘입 속의 검은 잎’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이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 자체가 기형도 시인에게 동화되는 과정입니다.

세상 부조리에 맞서 씩씩거리지도 대들지도 못하는 나. 무기력한 존재 상황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입’이자 ‘잎’은 어디선가 서성이고 있는 우리들이면서 동시에 건너편을 가리키는 검은 상징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란 작품도 많은 패러디를 낳습니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로 끝나는 시 제목도 다채롭게 변주되는 명문장입니다.

#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딛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시인 '눈물은 왜 짠가'중에서 >

강화도에 녹아든 함민복 시인은 가난을 통탄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날선 폭력성을 탓하지 않습니다. 가난이 나에게 무슨 의미이며 사람이 가난과 뒤섞이며 살아가는 일상적 느낌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몸의 피부처럼 살가운 가난 속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와닿는 작품이 바로 '눈물은 왜 짠가'. 몇년 후 함시인이 펴낸 산문집의 타이틀이 됩니다.

우리가 힘겨운 삶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성장동력'은 바로 '가난속 어머니의 힘'이 밑받침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빈부의 차이가 제도적으로 승계되는 첨단 정보화 자본주의. 여전히 가난한 21세기 일상의 사람들은 함민복 시인의 짜디짠 눈물로 인해 위로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울고 나면 힘이 나지 않나요.

# 시대에 스며들면서 시대를 은유하는 별칭으로 승화된 시집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전부 다 우리 고단한 역사를 비춰주는 별빛으로 반짝거리는 시집들입니다.


* 신동엽 시인 '껍데기는 가라'
* 김지하 시인 ‘타는 목마름으로’
* 박노해 시인 ‘노동의 새벽’
* 황동규 시인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곽재구 시인 '사평역에서'
* 정호승 시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시가 난해하면 독자는 멈칫합니다. 시인이 자기류에 빠져 동감과 공감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독자와의 시적 커뮤니케이션은 중단되고 맙니다. 그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난삽한 사랑의 시 들입니다. 문학적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랑 시들은 달콤한 제목으로 대중가요처럼 소비됩니다.말초적 감상이 넘치는 상업적 연시집은 문학적 향기는 남기지 못하고 금방 스러집니다.

메시지를 던져주는 시적 이미지. 이미지 형상화의 힘을 가진 단 한 줄의 시 제목은 시를 감상하기도 전에 우리 가슴을 벌써 울립니다. 삶에 흔들리는 독자가 불온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갈 때 시인은 이 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찾아냅니다. 핵심이 되는 시적 이미지는 그 시대의 이름이 됩니다. 그런 시들이 문학의 기억장치로 오래 오래 남습니다. 제목의 힘은 대단합니다.

 

김용길의 편집자의 벤치/동아일보,200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