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과 평론가들이 추천하는 박완서 책 한 권
"문학은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인간으로서의 자기 증명이라고 생각한다"던 작가 박완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쉴 수 있었으며, 지나간 날들을 위로받을 수 있었고, 주름진 마음도 한껏 펴볼 수 있었다. 수많은 작품 중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있겠냐마는, 문학계 후배들이 긴 고민 끝에 「레이디경향」 독자들이 이번 달에 꼭 한 번, 또는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작품을 꼽아주었다.
■ 민병일(시인)
티베트 네팔 기행산문집「모독」
박완서 선생님은 티베트 여행 후 "너무도 엄혹한 자연환경 때문에 내 생애에서 가장 고된 여행길"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선생님과 함께 여행을 했는데요. 노구를 이끌고 고산병을 감내하며 해발 5,200m의 고원을 묵묵히 다니시던 선생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행복이고 경이였습니다.
선생님은 고된 여행 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터키석 빛깔의 호숫가를 거닌다든지, 바늘쌈을 풀어놓은 것 같은 푸른 하늘을 보며 "인간의 입김이 서리기 전 태초의 하늘빛이 저랬을까?"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티베트나 네팔의 '길'은 디지털 시대의 시간과는 사뭇 다른, 생의 기억 이전 길을 보여줍니다. 선생님께서 티베트와 네팔을 여행한 것도 아마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길'의 원시성을 느껴보고 싶으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속도전이 능사가 되는 사회에서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줍니다.
타는 사람과 뛰는 사람과 달리는 사람은 가속력을 동력으로 하지만, 걷는 사람은 무언가 여유가 있고 의연해 보여 좋습니다. 살아가며 생기는 자신감이나 당당함이란 것도 과학적 메커니즘이 아닌, 걸으며 사유하는 동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 오수연(소설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선생님의 작품 중 어떤 것이 가장 좋았는지, 몇 살 위인 제 언니에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얘기하더군요. "개성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던 모습이 참 좋았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장면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 작품이 첫 번째였습니다. 자전소설이고 또 성장소설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개성은 선생님의 실제 고향이자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죠. 선생님께서 한국 문학에 지대하게 기여한 것 중 하나는 개성 지역의 문화와 개성 사람들의 삶을 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얼리즘 정신과 여성 해방의 관점도 개성 여인으로 월남해 살아오셨던 선생님의 인생에서 우러나왔을 겁니다. 이제 남에서건 북에서건 선생님 작품에만 보존되어 있는 것이 어디 '차려놓으면 꽃밭 같은 개성 밥상'뿐이겠습니까. 개성 사람으로서 바라본 근세사가 압축되어 있는 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경호(문학평론가)
장편소설 「엄마의 말뚝」
「엄마의 말뚝」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면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선생님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작가로서 글을 써서 시대와 맞서고 싶다'는 의욕을 갖도록 만든 불행한 가족사가 담겨 있는 작품이죠.
「엄마의 말뚝」은 분단, 전쟁, 오빠의 죽음 등 외가 쪽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분단 현실이 가장 대표적으로 다뤄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박완서 문학의 이야기성, 문학적 가치, 문장의 감칠맛이 가장 뛰어나게 반영돼 있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문학을 살펴보면 대개 아버지와 아들 혹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엄마와 딸로 이어지는 삶의 관계를 다뤘다는 점도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 임철우(소설가)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만나면서 느낀 부분인데, 「그 남자네 집」은 선생님의 생각이나 내밀한 감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선생님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그 남자와 애틋한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첫사랑의 열정을 매혹적으로 담아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 작품에 대해 "힘들었던 지난 시절을 견디게 해준 문학에 대한 헌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제가 특히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남자의 이야기라서'라기보다는 1950년대 초반의 풍경들, 옛날 동네, 사람 사는 모습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스토리 자체도 훌륭하지만 이러한 묘사가 훨씬 더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 정은숙(시인·마음산책 대표)
「친절한 복희씨」
「친절한 복희씨」는 선생님께서 77세 때 발표하신 소설집입니다. 당시 선생님은 이미 대가이신데도 문학적으로 그러한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신인 작가인 것처럼 자신의 새침한 성격을 드러내면서 감각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신비로웠습니다. '작가도 나이가 드는 법일 텐데, 문학에 있어서 만큼은 영원한 청춘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작품입니다. 사랑이나 인생과 같은 주제를 풀어내는 세밀함, 곰살 맞은 유머가 있어서 읽는 내내 정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 편혜영(소설가)
「나목」
「나목」은 선생님의 등단작입니다. 작가가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면서 화가 박수근을 만났던 일, 오빠의 죽음 등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배치되어 있지요. 그러면서도 이러한 요소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숙할 수도 있는 등단작인데, 「나목」에 나온 이미지들이 이후의 선생님 소설에서 계속 확장되면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나목」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6·25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시대임에도 선생님이 풀어놓으신 그 시대의 청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지금도 그런 청춘이 있을 것 같은 현재성이 느껴집니다.
<레이디경향, 2011.3.15 글 / 이연우 기자 ,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민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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