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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고목위의 개미

by 골든모티브 2010. 1. 8.

고목위의 개미

 

 

서울교육  2009 겨울호(196호)

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 보이는 것 모두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제법 한적한 가을 산을 터벅터벅 걸으며 생수를 과실주인양 음미하면서 천천히 들이마신다. 가슴 한편에 켜켜이 쌓여 꿈틀대는 일상과 번잡하고 감각적인 도시에서 벗어나 모처럼 친구들과 산행을 즐기고 있다. 우러러보면 나무 사이로 확 트인 하늘이 아득하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고, 굽어보면 깊숙한 골짜기마다 붉게 물들어 사람들 등산복에도 채색되어 비친다. 그동안의 삶의 무게를 다 벗어 던지기라도 하듯이 힘차게 두 팔을 들어 올려 보기도 하고 계곡 건너편으로 ‘야호, 야호’ 목청껏 소리쳐 혼탁한 가래를 지운 메아리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울긋불긋 단풍나무 숲을 뒤로 하고 넓은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님,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 주세요.” 이 녀석은 나를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꼭 아버님이라 호칭하고 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자랑삼아 너스레 떤다. 노총각이 애인이 생긴 모양이다.

 

늦은 저녁 선술집에서 미리 한 잔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이 그 녀석임에 틀림없다. 키가 어찌나 크던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소개할 때 8척이니 9척이니 하는 그런 정도의 장신이다. 모처럼 정장 양복으로 갖추어 입은 모습이 썩 멋있어 보이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아버님, 잘 지내셨죠?” 하고 등 뒤에서 덥석 껴안는다.

“이 녀석이!”

“아이 왜 그래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서로 안아 인사를 건넨다. 누군가에겐 이 광경이 흡사 고목나무 위의 매미쯤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 왜 혼자니?”

“먼저 약속 하나 해 주셔야 돼요.”

“뭔데?”

“주례를 맡아 주세요.”

“미친 놈! 야! 이 나이에 무슨 주례니, 사회자라면 모를까.”

“거부하시면 저 결혼 안 할래요.”

“그야 네 맘대로 하렴”. 껄껄껄…, 하하하…

 

“저…처음 뵙겠습니다.” 언제 왔는지 아리따운 아가씨가 곱게 차려 입은 투피스 차림으로 살포시 인사를 한다.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주례는 고등학교 은사님께 부탁드린다고 예전부터 그래 왔어요. 얼마나 선생님 자랑을 많이 하는지 은근히 질투가 다 날 지경이에요. 형님 같고 아버님 같은 분이라고 항상 입에 달고 살아요. 그래서 선생님이 어떤 분이실까 너무나도 궁금했어요. 역시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으니 정말 재미있고 정답게 느껴져서 제가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어요. 우리 인생의 새 출발을 선생님께서 맡아 주세요.”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가 아닌가요. 제가 이제 불혹(不惑)인데 주례로 나서면 부모님이나 축하하러 온 하객들에게 예의가 아니죠. 저보다 덕망이 있는 직장의 대표이사나 부모님과 잘 아시는 사회 저명인사들 중에서 선택하여 부탁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무튼 이쯤 하시지요.”

 

대충 얼버무리고 나서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옛 추억을 안주 삼아 목청을 높였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갈 때 목포에 태풍이 몰려와 배를 타지 못하고 다시 부산 김해공항으로 밤새 이동한 이야기, 그마저도 우리 반이 대기 끝번이라 제일 늦게 탑승해 다른 반보다 4~5시간 제주도에 늦게 도착해서 점심을 굶은 이야기, 선생님 결혼식 때 처음으로 서울 촌놈이 광주항쟁의 근거지였던 충장로와 금남로 구경을 하고 친구들과 밤을 꼬박 새우며 놀았던 이야기……, 시간 간 줄 모르고 묵혀 두었던 지난 일들을 토해내느라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을 목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제자들을 만날 때가 실로 행복하다. 내 머리에선 이미 까맣게 잊힌 일들을 아이들은 쌀독에서 콩을 쏙쏙 골라내듯이 다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입을 통하면 나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한 편의 리얼 다큐멘터리가 되어 발가벗겨지곤 한다. 그래서 졸업생들이 찾아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을 느끼는지 모른다.

주위의 탁자가 한 자리씩 비워지고 사람들의 인기척도 점점 멀어져 밤이 깊었음을 알아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빈 주막 구석에 주인 할머니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고, 벌어진 창문 틈새로 보름달만이 우리들의 달콤한 얘기를 들어주는 듯 정답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달이 오늘의 증인이 되리라.’ 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 주례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도 못하고 서로 헤어졌다. 취중에 “아버님이 주례 안서시면 저 결혼 안 해요.” 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할 뿐이다.

 

화창한 날씨가 잔뜩 찌푸리더니 서녘 하늘은 검붉게 물들어 있고 구름 사이로 빠끔히 보이던 해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건들장마도 때가 지났는데 여우비가 오려나 보다. 삐리릭~, 삐리릭~.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님, 아들이에요. 명동거리에서 총각 신분으로 마지막 데이트하고 쇼핑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에요. 내일 식장에서 뵐게요.” 하고 자기 말만하고 끊어 버린다. “이런 괘씸한 놈 봐라.”

예식장에 늦지 않기 위해서 아침 일찍 예복으로 갈아입고 얼굴 단장도 좀 하고 최대한 젊게 보이려고 치장을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오늘 주례 안 서죠?” 한다.

“주례는 무슨?”

“그 녀석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었겠지.”

 

졸업생들을 한꺼번에 만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설레고 내가 주인공인양 준비에 바쁘다. 서둘러서 강남에 있는 M호텔로 들어섰다. 역시 기대했던 만큼 제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저 혜실이예요.” “왜 제 결혼식에는 안 오셨어요? 서운해요……,” 한마디씩 하는 통에 정신이 없다. 이 녀석들을 물리치느라 진땀을 빼면서 신랑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한참 동안 처녀 총각의 마지막 모습을 피사체에 담아내느라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찰칵, 찰칵……

“어! 아버님!” 이 녀석이 나를 보더니 어린아이처럼 달려 나온다.

“그래, 멋지구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百年偕老)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함께 기념사진 찍어요.” 신랑 신부와 한 컷 담고 나오면서

“주례 선생님은 어떤 분이시니?”

“아버님! 주례 없어요.”

“야! 오늘 같은 날도 농담하니?”

“아버님이 아니면 저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요.” 퉁명스러운 말투다.

순간 머리를 둔탁한 방망이로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지면서 천장이 노랗게 물들고 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거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꿈인가 생시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저 녀석 하던 말이 진심이었단 말인가. 그 녀석의 표정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나의 심란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다리를 곧추세울 겨를도 없이 온몸에 힘이 빠져 얼굴은 창백해진다.

“여보, 어떻게 해봐요.” 나를 부추기며 집사람이 참견한다.

“당신이라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뭐! 난 한 번도 해 본 경험이 없는데……,”

“저 애들 결혼식을 망칠 셈이에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참 그렇지. 저 녀석들 오늘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지 않는가. 그러나 난 준비가 되어 있질 않는데 어찌 한단 말인가. 부모님과 함께 상의해 보자. “선생님만 믿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에 줄곧 땀만 닦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변명할 틈도 없이 사무실 직원이 끼어든다. “시나리오대로 읽으면 돼요. 선생님이시니까 잘 하실 것 아니에요.” 갈수록 태산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온통 나의 과녁에 대고 화살을 명중시킨다. 이미 난 숨조차 쉴 수가 없다. 그래도 상황을 수습해야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부모님에게 마지막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결국 주례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의뢰를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자리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딴 딴따단∼♬ ~……, 결혼 행진곡이 들린다. 신랑, 신부 입장 후에 주례 선생님의 엄숙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결국 난 식장 밖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제자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신혼여행이 끝날 무렵 해명을 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다. 더 이상 통화가 안 된다. 그 녀석은 얼마나 당황스러웠고 실망했을까?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님 같은 선생님이 이토록 중요한 생의 최고의 날을 하마터면 그르칠 뻔하였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자괴감(自愧)을 감출 수가 없고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 그 녀석과의 키 차이가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고목 위의 매미가 이제 개미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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