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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by 골든모티브 2010. 2. 7.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한국교원공제회 교육가족의 다락방 

 

혼 20주년이 되면 도혼식이라 한다. 질그릇 같은 투박한 삶을 살아온 부부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벌써 교사생활 20년을 맞이하고 두 해 후면 지천명에 접어든다. 계절로 말하면 늦가을에 접어든 인생인 셈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니 우리의 교육은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의 삶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왔는가. 세월이 거침없이 흐르는 요즈음 새삼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새파랗게 젊은 초년시절 교무수첩을 왼손에 회초리를 오른손에 들고 교실을 시작으로 아이들을 주눅 들게 하면서 학교 구석구석을 돌며 방방 뜨던 그 혈기는 다 어디로 갔는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마다 학급을 찾아가 반 아이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상담하면서 도시락을 함께 먹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가. 아이들은 서로 앞 다투어 담탱이의 도시락을 독점하려고 야단법석이다. 그렇게 교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황후의 밥보다 더 맛있다는 점심을 먹곤 했다.

 

주말이면 교실 환경미화를 하기 위해서 모여드는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떡볶이, 튀김, 감칠맛 나는 따끈한 오뎅국물 등 먹거리를 한 아름 싸들고 교실을 방문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선생님 최고야!”, “너무 멋져요!” 하며 아양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아이들과 함께 고궁을 관람하고 인근 남산을 오르며 손을 잡고 당기고 밀어주고 하면서 형처럼 오빠처럼 행세했던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방과 후 교육이니 야간 자율학습이니 해서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지만 그 때의 아련한 추억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보내온 제자들이 몇 있다.

 

“선생님과 보낸 시간들이 지나고 나니 더 많이 아쉬워요.”

“선생님 덕분에 행복하고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수 있었어요.”

“가끔은 하늘을 보면서 선생님 얼굴을 한번 그려 보아요.”

“제가 선생님이 된다면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자상한 멘토가 되고 싶어요.”

 

지금은 편지는커녕 되새기고 싶은 문자메시지 하나 없을 정도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지, 시대가 변하여 아이들이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제 또래의 이성끼리의 관심이 아주 높아지고 교내에서도 스스럼없이 스킨십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나를 잘 따르며 좋아하던 아이가 가출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신림동 카페와 다방을 전전긍긍하며 며칠씩 찾아 다녔다. 밤마다 학생들에게 수소문을 하여 제보를 받고 행적을 따라 다니며 억장이 무너지도록 아파하며 찾아다니던 기억이 있다. 경찰도 아닌 것이, 부모도 아닌 것이 내가 꼭 해야 할 일처럼 거의 일주일을 찾아 헤맸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여 공부도 싫고, 가족에게도 버림 받았다고 평소에 자주 이야기하며 어디론가 떠나버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사연이 복잡한 아이지만 반드시 찾아 학교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이슬을 맞아 가며 신림동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결국 그렇게 보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책상 위에 프리지어와 함께 안개꽃이 놓이기 시작했다. 항상 나보다 먼저 교무실에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화병의 물을 갈고 꽃이 시들지 않게 관리하는 흔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얼마나 향기가 은은하게 오랫동안 풍기는지 교무실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차곤 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나 보다. 역시나 그 녀석이 돌아왔던 것이다. 눈동자가 말갛게 빛나며 수줍음을 잘 타는 그 여학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나와 마주치자 순간 살짝 얼굴을 붉힌다. 지금도 샛노란 꽃망울의 프리지어를 보면 항상 그 아이가 떠오르며 은은하고 감미롭게 피어나는 그 향기를 통해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 클로즈업 되곤 한다.

 

나도 중 3때 국사선생님을 무척 좋아한 적이 있다. 미와 실력을 모두 갖춘 똑 부러진 우리학교 최고의 인기 있는 선생님이셨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인사부터 하려고 경쟁한다. 그 시간만 되면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자리를 바꾸고 칠판을 깨끗하게 지워 놓고 주변의 휴지도 줍는다. 예습과 복습도 철저하게 해서 미리 질문에 대비를 한다. 어쩌다 칭찬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꼭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셨는데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서두른다. 그러다 버스를 놓치면 꼭 내 자전거를 이용하여 30분 정도를 씽씽 달려 읍내로 나가 다른 버스를 타야한다. 오늘도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신작로를 달린다. 그 때의 시골길은 포장되지 않는 울퉁불퉁한 길이기 때문에 자전거는 퉁퉁 튀며 흔들리기가 십상이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등 뒤에서 내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는다.

야릇하고 은은한 향수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코끝을 스친다. 급기야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자전거도 함께 콩콩거린다. 무섭다고 살살 좀 가라고 자꾸 소리치시지만 난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야호” 하고 소리치며 더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누렇게 익은 황금빛 들판을 가로질러 파란 하늘로 꿈같은 길을 신나게 달린다. 저만치 외로운 허수아비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런데 그 해 하얀 눈이 내리는 날 갑자기 결혼하시고 말았다. 세상은 온통 함박눈이 날리는데 내 마음은 안개비에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어찌나 허전하고 슬프던지 그렇게 사랑을 키워 가고 아픔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 되면 가끔 찾아가 뵙는다.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아직도 따뜻하게 전해지는 눈빛과 고운 목소리는 여전하시다. 이제는 흰머리가 희긋희긋 보이는 이모님 같은 전형적인 아줌마의 모습이지만 나에게는 추억과 사랑을 싹트게 해주신 영원한 스승님이시다. 누구에게나 꿈을 심어준 선생님이 있겠지만 중학교 때 항상 내 자전거를 애용해 준 예쁜 그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즈음 교육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닌 교사와 학생의 관계 더 나아가 강사와 수험생의 관계로 통한다. 우리 모두는 스승이 아닌 강사로 추락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따끔한 회초리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동적인 사랑도 사라지고 있다. 인성보다 지식, 꿈보다 대학, 잠재력보다 눈앞의 성적이 학생들에게 중요할 뿐이다. 오직 명문대 진학을 위한 성적 올리기에 급급할 따름이다. 모든 것을 수능 점수와 내신 성적 그리고 대학합격에 올인하는 전인교육(?)이 학교의 현실이다. 시험 잘 보는 학생만 인재라고 생각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창의적인 인간교육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우리는 잘 세공된 학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된 원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동기쌤~~~” 하고 불러주는 학생과 가끔 찾아주는 졸업생이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되고 보람을 느낀다. 잠시나마 아직도 제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착각하곤 한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고목은 나목이 되어 연두색 빛의 새싹이 돋아날 때쯤이 되면 나에게는 새로운 아이들이 찾아온다. 서로 낯설고 익숙하지 않는 모습과 그저 발랄하고 거리낌 없는 행동을 통해 세대 차이를 느낀다. 군대에서 신병 전입신고 받듯 질서 정연하고 경건하게 입학식을 치루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시작된다.

 

신록이 우거져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로 진한 녹음이 교정을 휘감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강렬한 땡볕이 내릴 때 아이들은 뜨거운 가마솥에 살짝 델친 우거지 모양 축 늘어져 헉헉대며 등줄기에 땀을 내놓는다. 이때는 공부는 뒷전이고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저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렇게 꿈속에서 몽상만 즐기는 녀석들이 더러 있다.

 

교정의 담쟁이가 거미줄을 치듯 벽을 올라타 본관건물을 붉게 물들이면 학교는 ‘청라제’로 온통 시끌벅적 야단스럽고 다시 아이들은 생기가 돌며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이들도 많이 성장하여 황금들판에서 농부가 추수를 하듯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이삭줍기에 열을 올린다. 이때가 가장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낼 때인가 싶고 정이 많이 든다. 주변의 풍경은 온통 가을을 재촉하며 색소에 담갔다가 바로 건져 올린 비단처럼 청록의 구분 없이 전부 홍으로 물들인다.

 

찬바람이 쌩쌩 창문을 흔들며 바람 스치는 소리가 거세지면 아이들은 교실에서 옴짝달싹 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 바람을 붙잡고 지는 꽃을 보며 마음을 다 잡아 영글지 못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만 시간은 쉬 내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얀 눈이 내리는 날 훌쩍 학교를 떠나버린다.

 

이렇듯 3년을 주기로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어느덧 묵은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자연의 섭리처럼 그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듯 아이들을 만나고 또 아이들과 헤어지지만 난 아이들을 결코 보내지 않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 생각난다. 보다 큰 만남을 위해 냇물에서 잡은 물고기를 강으로 보내듯이 그들을 그냥 그대로 놓아 준다.

 

<2010. 1. 25.  한국교원공제회 교육가족의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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