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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아재와 방패연

by 골든모티브 2010. 1. 7.

 

아재와 방패연

 

 

한국크리스천문학 43호(겨울)

 

 

이 세차게 날리는 그해 겨울, 멀리서 수요 예배를 알리는 교회당의 쇠북(鍾)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빨갛게 잘 익은 사과 같은 해가 뉘엿뉘엿 안산으로 떨어진다. 추운 바깥 풍경과는 달리 사랑방 정지에서는 가마솥에 김이 모락모락 나며 소여물 쑤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머슴은 장작불의 따뜻한 온기로 긴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새벽부터 송아지와 함께 되새김질을 하던 ‘누렁이’가 벌써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음매 음매’~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핑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 쇠죽을 달라는 눈치다. 그럴 때마다 군둥댁 머슴 내외는 부산하게 움직이며 가축들에게 먹이를 준다.

 

이태 전에 할머니께서 장에 나가 주먹만 한 집토끼 한 쌍을 사온 뒤로 그 놈들은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사랑방 모퉁이에 사과 궤짝으로 집을 만들어 온갖 정성을 다하며 여태까지 기르고 있다. 추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소를 몰고 들판에서 돌아올 때 토끼풀을 한 망태기 가득 뜯어와 그것으로 먹이를 하였는데 이제는 시래기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을 많이 준비해 둬야 한겨울을 대비할 수가 있다. 어찌나 먹는 모습이 귀엽고 예쁘던지 꼭 안아 주고 싶다. 하얀 목화송이처럼 보송보송하고 포근해 보이는 털이 더욱 탐스럽고 눈이 부시다.

 

겨울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이 부드럽고 고운 토끼털이나 족제비 털로 귀마개와 목도리를 만들어 자랑스럽게 걸고 다닌다. 이 녀석들에게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 “아무 걱정 말아라, 내가 지켜 줄게.” 벌겋고 커다란 눈이 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놀란 토끼눈이 된다. 마치 아가의 선한 눈빛을 보는 것과 같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시나브로 정이 들어 가족이 다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끼장에 수컷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요즈음 다른 집에서도 한 마리씩 없어지곤 한다는 소문이 들린 이후다. 이따금 족제비가 토끼를 물어간 적은 있다. 혹시 주변에 나와 있지 않나 하고 외양간 쪽과 헛간의 짚벼늘 사이 그리고 뒤 안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점점 불안해지고 이상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던 찰라 군둥 아짐이 “도련님, 사랑채로 내려와유. 잔치가 벌어졌당께.”

 

마을 청년들이 가끔 꿩과 참새, 청둥오리를 사냥해 오면 우리 사랑채로 몰려와 온종일 시끌벅적대며 야단스럽게 먹어 치운다. 설마 하면서 달려갔지만 역시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울며불며 마당 한 가운데서 뒹굴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당황한 군둥 아재는 “다시는 안 그러마, 다음 장날에 가서 꼭 사다 줄게.” 하며 달래기도 하고, “안 그러면 도련님이 제일 좋아하는 연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화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드렸다.

“그럼 홍어딱지 말고 방패연을 맹글어 줘야 해.”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며 나는 한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추수가 끝나면 농한기에 접어들지만 사랑채는 더욱 부산해진다. 쇠죽 쑤기,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마람 엮기, 장작 패기 등 궁둥이 뒤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인다. 이런 와중에 군둥 아재는 집토끼를 잡아먹은 대가치고는 너무 큰 곤혹을 치른다. 방패연을 만들려면 대가 필요한데 왕대는 강진댁 대밭에도 있지만 시누대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 이웃 동네로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며 사정사정해야 겨우 얻어 올 수 있다. 가늘고 긴 낭창낭창한 시누대를 낫으로 손질하고 세심하게 다듬어서 연살을 만들고 창호지를 덧붙여 방패연을 완성한다. 덤으로 홍어딱지까지 새끼를 쳤다.

“야호! 우리 아재 최고야.”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우리 집 ‘백구’도 꼬리를 치며 덩달아 신나게 날뛴다.

 

방울달린 털모자를 쓴 소꿉동무들이 동네 쉼터인 ‘우산각’ 근처 양지바른 곳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연을 날린다. 바람이 잠잠하면 보리밭을 가로질러 힘차게 반대편으로 달려야 연이 가라앉지 않고 다시 솟구쳐 바람을 타며 하늘 높이 올라간다. 눈이 녹은 질퍽한 보리밭을 달리다 보면 흙덩이가 고무신에 덕지덕지 엉겨 붙어 마치 묵직한 ‘설피’ 모양으로 되어 버린다. 아이들은 보통 꼬랑지가 긴 홍어딱지를 날리지만 내 것은 모두가 선망하는 방패연이다. 이제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다.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제 연싸움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오늘은 누가 더 멀리, 높이 날리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연줄을 끊어 내어 상대방 연을 떨어뜨리는 싸움이다. 서로 이기기 위해서 얼레를 당겼다 내주었다 하기도 하고 좌우로 흔들기도 하며 기 싸움이 한창이다. 솜털 같은 눈발이 날리는 한적한 하늘에 전운이 흐르며 팽팽한 긴장감마저 돈다. 손등이 갈라질 정도의 매서운 칼바람이 불지만 육각형 얼레를 수없이 흔들어 대는 손에는 땀이 찰 정도로 후끈거린다. 형들은 연실을 사금파리 가루에 풀을 매겨 살벌한 싸움을 하지만 우린 그러기에는 아직 순수한 면이 남아 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내 방패연이 윙윙거리는 왕벌마냥 날갯짓하듯 멋지게 날아오른다. 철새들의 군무 사이로 늠름하고 당당하게 비행하며 벌써 개선장군 행세를 한다. ‘아차’하는 순간 서로 실랑이를 벌이던 연이 곡예를 하며 한 바퀴 원을 그리더니 연실을 팽팽히 당긴다. 누군가 연줄을 아주 강하게 낚아채는 순간 내 연이 힘을 잃고 넘실넘실 흔들리며 춤을 추더니 저 넘어 팽나무 가지에 걸려 외롭게 팔랑거린다. 이런 낭패가 있나. 재빨리 간짓대를 가져와 이리저리 건드려보지만 이내 썩은 가지가 부러지며 추수가 끝난 텅 빈 논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허우대 좋던 방패연이 고샅길에서 거인이 맥없이 자빠지듯이 그렇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약이 잔뜩 올라 얼굴이 벌게지며 붉으락푸르락하는 모습을 애써 감춘다.

 

방패연이 홍어딱지한테 지다니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내 방패연을 무력화시킨 건 다름 아닌 우리 집 군둥 아재 아들이다. 그 자식은 명주실이 아닌 질긴 나일론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지난 장날 아부지가 사주었다고 자랑하더니……, 속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아재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느그 아부지 오늘부터 해고야.

“당장 짐 싸서 우리 집에서 나가!”

이렇게 사랑채 쪽에 대고 마구 퍼부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하더니 홧김에 소리만 질러대는 꼴이 딱 그 짝이다.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교회당의 종소리는 내 귓전을 맴돌고…….

안산 ‘녹두바우’의 인자한 얼굴이 이 광경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200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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