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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독을 차고 - 김영랑

by 골든모티브 2011. 5. 9.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1939년)-

 

 

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해설 - 김동기

 

한국현대시가 탄생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는 학생들에게 어렵다. 학교시험과 수능준비로 인해서 시는 골치 아픈 존재로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은 비유, 이것은 상징, 운운하며 도식적인 분석으로 밑줄 그으며 시를 파편화시킨다. 결국 시를 토막 내서 죽이는 것이다. 자꾸 머리로만 생각하고 가슴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시는 자꾸 멀어지고 도망간다.

 

죽은 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를 접하며 시와 친해지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 끝에 <시야! 수필과 한바탕 놀아 보자> 라는 주제로 시와 산문 낭송 축제를 하고 있다. 지난여름 작고 문인의 애송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한 학생이 <독을 차고>를 낭송하고 있었다. 순간 빛바랜 낡은 필름에서 두근거리며 한 장의 사진이 불쑥 튀어 나왔다. 17년 전 비리재단 퇴진과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한 민주화운동이 떠올랐다. 그때 교무실에서 철야농성을 하면서 많은 내적 갈등과 피눈물나는 고통에 휩싸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마는마음을 다잡기 위해 <독을 차고>를 수없이 낭독하며 암담한 학교현실에 대해 맞설 것을 다짐하면서 삭발투혼을 한 적이 있다. 내 마음에 한 번도 독을 품은 적이 없었지만 우리 학생들과 학교를 위해 재단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슬픈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독을 안 차고 살아도결국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허무한 일인데 독을 차서 무엇 하느냐?’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자고 동료들이 회유하며 말렸다. 그리고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치열한 삶과 국어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하며 참여하지 않은 교사들을 역으로 설득한 적이 있다.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중달을 이기듯이 영랑의 독기가 나를 깨우친 것이다.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시인의 역사의식이 나의 암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북에는 소월, 남도에는 영랑이라 일컬을 정도로 순수 서정시의 극치를 보여준 시인이 더 이상 일제 강점기하 현실을 두고 볼 수 없듯이 나도 이리나 승냥이 같은 맹수에게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는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독을 품고 부도덕한 비리재단 퇴진과 교육정상화 투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줄 뻔했다.

 

영랑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듯 나는 신학기가 되면 맑고 총총한 눈망울과 순수한 마음씨를 지닌 학생들을 기다린다. / 창비 국어선생님의 시배달2 /한서고 김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