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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윤동주와 정지용 짝사랑에 빠지다

by 골든모티브 2010. 2. 27.

윤동주와 정지용 짝사랑에 빠지다

 

강서문단 제5호(2010)

 

나먼 교토(京都) 땅에서 윤동주와 정지용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어느새 버스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서문 앞에 멈추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수위실에서 캠퍼스 안내도와 시비 소책자를 받고 동주형이 매일 거닐었을 길을 따라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하리스이화관 교정으로 향했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붉은색 벽돌로 이루어진 삼각형 건물의 예배당을 지나 도시샤대학 100주년 기념비 건너편에 다정하게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시비를 보는 순간 남다른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다. 차가운 이국땅에서 돌이 된 채로 이렇게 만나다니, 또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제 둘이 되어 밤새 이야기를 하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들의 시는 바람을 타고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먼저 무궁화나무 옆에 있는 저항시인 윤동주 시비 앞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이른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떠올린다. 그리고 옆으로 몇 발자국 옮겨 수양버들사이로 향수의 시인 정지용 시비와 조우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시인은 똑같이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1945)하고 정지용은 월북하여 평양 교도소에서 미국의 폭격에 폭사(1950, 또는 행방불명)한다. 이들은 또 도시샤대학 영문과 선후배사이이다. 정지용이 19년 먼저 입학하여 6년 동안의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바다’, ‘압천등 많은 작품 남긴다.

 

그러나 시비는 공교롭게도 후배가 먼저 빛을 보았다. 윤동주는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 주도로 과거의 역사를 잊을 수는 없다고 해도 잘못을 용서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를바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그로부터 10년 후 정지용 시비는 충북 옥천문화원 주도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일본에서도 시인에 대한 시문학 정신을 인정받은 데다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의미가 크다할 수 있다. 일본 땅 도시샤대학에서 두 유학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시압천이 한글로 새겨져 당당하게 빛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943년 윤동주는 조선어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이유가 무색하게 되었다. 한글로 새겨진 시비가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 벅찬 일인가? 후에 정지용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면서 윤동주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었다.

 

시비 바로 앞에는 퇴색한 예배당이 우뚝 서 있다. 분명 윤동주는 이 예배당을 드나들면서 참회를 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살자고 기도했을 것이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면서 마음을 다 잡았을 것이다. 또한 고통스런 현실에서 자신의 진실한 삶을 꿈꾸며 자기성찰을 수없이 맹세하고 외쳤을 것이다. 이런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예배당 옆에 있는 거대한 녹나무 고목이 항상 지켜보고 위로를 해주었을 게다. 여름에는 의자에 앉아 쉬어가라고 긴 그늘을 내어 주고, 가을에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선혈처럼 붉은 단풍을 떨구며 친구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이제 그 무명시인이 한국 문학사의 큰 별이 되어 그 고목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며 사랑을 받고 있다. 이끼 낀 고목도 윤동주의 순결하고 곧은 지사적 기개를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형처럼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어루만져주고 감싸 주었을 것이다. 특히 신록이 무성하여 녹음이 짙어질수록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더욱 정을 돈독히 쌓았겠지. 그래서 65년이 지난 뒤에도 이렇게 한시도 서로를 떠나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시련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윤동주 시는 일본 고등학교 신편 현대문이라는 교과서에 이바라키 노리코의 해설로 실려 있다. 이제 그는 조선어를 사용한 일본의 죄인이 아니라 모국어를 지킨 영웅으로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북간도에서도 윤동주는 길이길이 하늘의 별이 되어 세상에 빛을 주고 어둠을 밝히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정지용은 무지개를 형상화한 반원형의 화강암 시비에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 그리고 1924년 유학시절에 쓴 압천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압천은 도지샤대학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교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가모가와 강을 말한다. 지금은 물도 많이 흐르지 않고 모래와 잡초를 드러낸 채 새들만이 지저귀며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서울의 청계천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봄에는 풀꽃과 만개한 벚꽃이 화려하게 흩날려 강변을 수놓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정지용도 유학시절 다카하라의 하숙집과 학교를 오가며 강변에서 시심을 키우며 친구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그리고 압천의 일몰을 보면서 바다 건너 조국을 생각하며 외로움과 절절한 그리움을 느꼈을 것이다.

 

鴨川 十里벌에

해는 저물어......해는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이하생략)

 

정지용은 실제 윤동주를 만나지는 못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인을 흠모하였으며 <정지용 시집>을 붉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 밑에는 스스로 걸작(傑作)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석양을 바라보며 옥천 고향에서 나라를 잃은 설움과 괴로움으로 신음하고 있는 친구들과 부모님 떠올리며 흘린 눈물이 압천 한쪽에 또 하나의 소()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두시인과 오상순, 김말봉 등의 문인들을 길러낸 도시샤대학이 왠지 무척 커 보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정이 들어 가이드의 채근하는 시간이 못내 아쉽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겨울의 차가운 날씨에도 바람은 훈훈하게 불어와 언 가슴을 녹여주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도 우리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반가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앙상한 가지 끝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무척 정답게 들리고 나의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어머니의 품안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두 시인이 거닐었을 흔적을 따라 교정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아쉬운 작별을 고하듯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시비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고목에게 입맞춤을 해본다.

정문의 수위 아저씨도 내 마음을 아는지 미소를 지어 보내며 무어라고 중얼댄다. 당신들은 자랑스러운 윤동주의 후예들이여!

 

2010.1.27.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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