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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시론 칼럼

민족시인 윤동주 서거 60주년

by 골든모티브 2008. 1. 12.
윤동주 서거 60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육필과 다른 표현 570개, 창씨개명 후 탄생한 ‘참회록’

 

눈물 어린 참회와 서정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안겨준 시인. 이역의 차디찬 감옥에서 2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독립운동가. 그러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윤동주와 그의 시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지난 2월16일은 윤동주의 60주기였다. 그의 유일한 혈육과 뜻있는 학자들이 60년 만에 다시 그려낸 시인의 ‘문학 초상’.

은진중학교 시절의 윤동주(오른쪽)와 그의 절친한 벗 문익환(뒷줄 가운데).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나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 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 윤동주 연구의 원전으로 취급되어온 저간의 사정에는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시인 자신의 손에 의해 발표된 것이 아니라 모두 ‘유작(遺作)’ 형태로 유가족을 통해 공개됐다. 사정이 이렇다면 윤동주 연구자 중 누구라도 원본에 접근해 한 번쯤 유작으로서의 자격을 검증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집의 편집과정에 줄곧 고 정병욱 교수가 깊숙이 관여한 점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병욱 교수가 누구인가. 그는 윤동주가 생전에 육필로 된 자선 시고집(詩稿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편 수록) 중 하나를 넘겨줬을 만큼 연희전문 시절 아주 가까웠던 친구였다. 더구나 그는 국문학자다. 하지만 인문학 연구의 경우 원전 확정 문제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기본 요건이다. 뿐만 아니라 고 정병욱 교수의 누이는 윤동주의 동생인 고 윤일주 교수와 결혼했다. 따라서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사후 그 유가족과 가족관계가 된 것이다.
일반 독자가 아닌 전문 연구자라면 애당초 원전 확정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이미 시인이 타계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임에도 ‘유작(遺作)’들이 자꾸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어야 했다.
실제로 윤동주의 유작은 1948년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경우 31편이 수록됐는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진지한 연구자라면 이제 어느 판본을 ‘윤동주 연구’의 원전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육필 시고에 접근하려 나선 연구자는 없었다는 것이 유가족의 증언이다.
이러한 기현상을 답답해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연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유가족이었다. 그들은 윤동주 연구의 새 장을 열기 위하여 용단을 내렸다. 윤동주가 생전에 남긴 모든 육필 초고를 사진 자료로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1999년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발간된 직후 이를 입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면밀하게 대조했고, 그 결과 그동안 원전 노릇을 해온 이 유고 시집을 원전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나는 줄곧 원전 확정 작업에 매달려왔다. 내가 윤동주 시들의 원전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사진판’의 1차 자료에 나타난 어휘에 덧붙인 교정, 해설만도 1700여 항목에 달한다. 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텍스트의 어휘 중 1차 자료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려 570여 곳이었다. ]
홍장학 교사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지난해 7월 ‘정본 윤동주 전집’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 두 권을 펴냈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는 이 책들을 ‘2004년 올해의 도서’로 선정했다.
 
<중략>
  
 
언제 이렇게 2004년 12월 12일 남산 문학의 집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에서 상지대 신길우 교수가 발표한 논문은 제목 자체가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다. 사정이 이쯤 되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서글픈 마음으로 불렀을 윤동주 시인의 문학적 초상을 다시 그려야 할 것 같다.
윤동주의 고향은 잘 알려진 대로 북간도다. 구한말의 국운쇠퇴기에 주로 함경도 지방의 조선인들이 이주해 터를 잡았던 ‘이주민의 땅’ 북간도. 그곳은 일제에 강탈당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이 암약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기도 했다. 북간도에서도 ‘밝은 동쪽 마을’ 혹은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明東村)이 윤동주의 출생지다. 1917년 12월 30일, ‘해환’이라는 아명(兒名)의 윤동주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곳은 청나라의 발원지인 중국 땅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윤동주는 남의 나라 땅에서 태어난, 조금은 ‘슬픈 족속’이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의 詩 ‘슬픈 족속’ 전문
 
왼쪽의 사진은 윤동주의 동시 ‘봄1’의 육필원고, 가운데는 정병욱 교수가 갖고 있는 육필원고, 오른쪽은 윤동주의 동시 ‘굴뚝’의 육필원고다. 윤 시인이 쓴 함경도 방언 ‘가마목’을 정병욱 교수가 서울말 ‘부뜨막’으로 고쳤다. 동그라미 안의 글자들을 비교해보면, 윤동주의 필체와 정병욱의 필체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윤동주는 잉크를 사용하여 퇴고했는데 ‘부뜨막’이란 단어의 퇴고는 연필로 하여 흐릿하다.
훗날 윤동주의 집안이 이사한 룽징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는 명동촌은 1899년 윤동주의 외삼촌인 규암(圭巖) 김약연 등 네 가문이 집단으로 이주해 형성한 정착촌이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 가족은 1년 뒤인 1900년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북간도 룽징에서 나고 묻히다
 
20세기의 첫 해에 이주민이 된 윤동주의 선조들은 한 해 먼저 정착한 조선사람들과 함께 농토를 일궜다. 함경도 지방의 지식인이면서 선각자인 이들은 명동촌에 명동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여러 개의 교회를 세워 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어나갔다.
윤동주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명동소학교와 룽징에 있는 미션스쿨 은진중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 동갑내기 친구인 문익환 등과 함께 공부했다.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반대 표시로 자퇴하고 만다. 다시 룽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이하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만류해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한국인의 최고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그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학창생활을 보낸 윤동주가 본격적인 시련기에 접어든 때가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942년경이다. 그는 도일(渡日) 수속을 밟기 위해서 ‘平沼東柱’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그 무렵 쓴 시가 ‘참회록’이며, 이는 윤동주가 한국에서 쓴 마지막 시가 됐다.
윤동주는 동경 릿교(入敎)대학에서 6개월 정도 영문학을 공부하다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겨 역시 영문학을 공부하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 갇혔다. 조국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윤동주는 ‘영원한 청년’의 고결한 이미지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일본에서 화장한 윤동주의 유해는 출생지인 북간도 룽징에 묻혔다.
 

해외에서만 성대한 ‘윤동주 60주기’

 

윤동주 시인의 묘소 앞에서 ‘서시’를 낭송하는 중국 동포 소녀들.
윤동주 시인은 현대 용어로 얘기하면 ‘이민자’에 해당하는 이주민의 후예다. 그는 모국에서 보낸 5년 남짓한 유학생활(평양 숭실학교, 연희전문)을 빼면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북간도와 일본 등지의 이역에서 살았다.
그 때문일까.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 열기는 모국이 아닌 해외에서 더 뜨겁다. 여동생 윤혜원씨가 살고 있는 호주 시드니와 그의 고향 룽징을 비롯해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특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일본에서는 사흘에 걸쳐 도쿄, 교토, 후쿠오카에서 다양한 형태의 추모행사가 펼쳐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모 신문사 기자의 칼럼처럼 ‘조촐한 너무나 조촐한’ 윤동주 60주기 추모제가 연세대 안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서 열렸다고 한다. 유족대표로 윤인석 교수가 참석했고, 연세대 총장과 학생 등 2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보도됐다.
여동생 윤혜원씨는 “서울의 유족들이 조용하게 추모하기를 원한 것으로 안다”면서도 섭섭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2004년에 심장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윤혜원씨는 남편 오형범(82·시드니 우리교회 장로)씨와 함께 시드니 추모행사의 다과를 손수 준비했다.
한국에는 윤동주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40명 가까이 되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각종 연구서적도 수십 권에 이르며, 학술논문은 300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윤동주 문학상’도 2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호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특별강사로 초청된 홍장학 교사는 “윤동주 시인은 국민시인이다. 그의 60주기를 그런 식으로 보내다니 참으로 실망스럽다. 얼마나 고독하게 죽어가신 분인데…”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서울에선 조금 이른 시기에 윤동주 추모행사가 열렸다. 2004년 12월, 서울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가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회장 김우종)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후원으로 열린 것.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의 추모행사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지난 2월12일 일본 후쿠오카 클로오코트 호텔 세미나실에서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 문학 세미나’를 마련한 것. 이들은 세미나 다음날인 2월13일 오전에도 일본 후쿠오카 구치소(옛 형무소) 뒷마당에서 한국문인 26명, 일본인 8명, 미국동포 시인 1명 등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다음은 서울 문학의 집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에서 문학계간지 ‘문예춘추’의 신길우 주간이 발표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들’의 요약이다.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들
 
[ 이 글은 본인이 2003년 3월 중국 옌볜대 초빙교수로 근무할 때 마침 윤동주의 묘를 개수하러 옌지(延吉)에 와 있던 윤혜원·오형범 부부와 여러 차례 만나서 직접 들었던 이야기다.
묘비에 ‘詩人’이라 붙인 이유 :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윤동주는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발표된 시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45년 6월 14일에 세운 윤동주의 묘비에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시인으로 등단한 일도 없고 시집을 낸 사실도 없는데 어째서 ‘시인’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장례식이 끝난 뒤 묘비 건립을 준비하면서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 육필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이 육필시집은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 자선 육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여 낸 것이다. 이 시집은 육필로 3벌을 만들었는데, 1벌을 당시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또 1벌은 정병욱에게 줬다고 했다.”
묘비에 연호(年號) 대신 서기(西紀)를 쓴 까닭 :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가 아닌 서기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연호를 사용했는데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이에 대해 오형범씨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들려줬다. “윤동주는 한국사람이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습니까”
비문(碑文)은 부친의 친구인 김석관 선생이 짓고 썼는데, 그는 윤동주의 스승이자 명동학교의 학감을 지낸 분이다. 비문도 일제 강점기의 것이라 그 속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운명하니.”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 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 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1948년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처럼.]
 
 
<중략>
 
 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글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
발행일 : 신동아 2005 년 4월호 (통권 547 호)
쪽수 : 446 ~ 467 쪽 /http://shindong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