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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시론 칼럼

황동규 시인 등단 50주년

by 골든모티브 2008. 1. 13.

등단 50년 - 황동규 시인

 

"과거 아버님(황순원)과의 관계를 물으면 불쾌했어요"

 

  • 시와 대화하며 인생 깨달아… 다시 태어나도 문학할 것”
  • 애송시 즐거운 편지 - 고3 때 짝사랑했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전해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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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단 50년을 맞은 황동규 시인은“시를 쓰는 건 이 세상에서 안 보였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것”이라며“지난 10년동안 가장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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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3시 약속에, 어쩌다 보니 2시57분에 도착했는데, 황동규(黃東奎) 시인은 그게 몹시 신기한지 “호, 기자이니까 과연 정확하군요”라고 감탄했다.

    연애하는 청춘들이라면 한번쯤 인용했을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는 시를 쓴 그에게 핸섬한 신사를 기대했는데. 그는 흔한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했고, 추위에 약한 노인들이 그렇듯이 조끼에다 등산용 셔츠를 목까지 올려 입고 있었다.

    서울대 교수(영문학)에서 4년 전 정년 퇴임한 뒤로 그만의 연구실은 없었다. 다른 명예교수들과 방을 공유했고, 칸막이를 친 책상 하나의 공간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찻잎을 담은 컵을 들고 정수기에서 온수를 따른 뒤, 1층 세미나실에 앉았다.

    선생의 작품 중에 ‘즐거운 편지’는 ‘편지’와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에서 낭송되면서 굉장히 유명해졌지요. 그 시가 고3 때 쓴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교지(校誌)에 실렸던 것입니다. 완성도에서 만족스러웠지요. 그러니 글자 한 자(字) 덧붙이지 않고 나중에 이 작품으로 ‘현대문학’ 추천(1958년)까지 받아 등단했지요.”

    ―올해로 등단 50년이 되었고,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되셨는데.

    그는 “우리 나이가 아니라, 만(滿)으로 일흔”이라고 정정한 뒤, 웃으면서 “슬프지만”이라고 덧붙였다.

    ―겨우 고3 때 쓴 시로 선생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보면 새파란 나이 때의 시인데.

    “애송시가 꼭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시가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고3 때 짝사랑했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전해준 시였으니, 완전히 고3의 시라고 볼 수는 없죠. 처음에는 김소월과 한용운 유의 연애시를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고 바랄 수도 없다는 것이 됐어요.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는 구절처럼. 사랑도 선택이고, 중간에 그칠 수도 있고, 그럼에도 온몸을 바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인 연애시일지 모르죠.”

    ―과학적으로는 사랑의 감정이란 대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고, 1년 6개월만 지속된다고 하더군요. 이렇다면 사랑도 별거 아닌 것 아닌가요?

    “사랑은 멈췄다가 또다시 다르게 시작할 수도 있고, 또 정(情)으로 바뀌어 지속될 수 있지요. 사랑 감정은 일생 동안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섬광(閃光) 같은 것입니다. 굉장히 귀중한 것이죠. 그 순간으로 평생 살아갈 가치가 부여될 수도 있습니다.”

    ―고3 때 어떻게 ‘이 사랑도 멈출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했습니까? 이전부터 연애를 많이 해봤던 겁니까?

    “당시 6·25 사변 직후라 ‘실존주의’ 영향을 받았지요. 실존주의 철학을 알았던 게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 물들었던 거죠. 또 연애를 많이 했다기보다는 짝사랑을 한 거죠. 짝사랑이 어떻게 보면 더 간절할 수가 있지요.”

    ―연모하던 여인은 나중에 만났나요?

    “그 여인을 나중에 만나니까 과거에 들었던 감정은 없어지더라고요. 제가 미국 버클리대학에 가있을 때(1997년), 새벽 3시쯤 어느 기자로부터 ‘즐거운 편지가 떴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냐 묻기에, ‘밝힐 수가 없다’고 했지요. 기자들이란 직업적인 속성으로 뭘 자꾸 덧붙이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세간에서는 황동규를 ‘연애시인’으로 받아들이는데, 본인으로서는 어떻습니까?

    거부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제 시의 1할은 연애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그만 사랑 노래’니 ‘더 조그만 사랑 노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서정시인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연애시를 떠나 서정시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이를 확대하면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도 되고, 약자를 위한 사랑도 되고, 인간의 인간다움을 사랑하는 것도 되고, 다 거기서 출발하는 거죠.”

    ―서울대 교수로 정년 퇴임해서 그런지, 작가로서의 어떤 치열한 삶 같은 게 별로 안 느껴집니다.

    “안정된 삶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던 작가들이 대학교수가 된 다음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남보다 몇 배의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어떤 때는 자기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것을 부정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안주할 수 없었지요. 늘 목마르고 더 나가려고 했지요.”

    ―본인의 시적 재능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진 적은 없습니까? 특히 선생을 추천한 천부(天賦)의 시인 서정주나 삶 자체로도 치열했던 김수영 시인과 비교해서는?

    “난 처음에는 작곡가가 되려고 그랬어요. 음악을 듣고 악보를 그릴 만큼 청음(聽音) 실력은 좋은데, 발성에 자신이 없어 포기를 했죠. 작곡가는 발성과 상관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하고 포기했죠. 그래서 시를 선택했습니다.

    제 시작(詩作) 활동은 지난 10년 동안이 가장 왕성했어요. 아직도 언어와 언어를 고르고 다듬고, 또 부정하고 모색합니다. 서정주와 김수영 선생은 가장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세계는 나와는 다릅니다. 나는 다른 길을 헤쳐나갔습니다. 제가 조금 더 밀고 나가지 못한 부분은 있을지 모르지만, 시적 재능에 절망한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시를 씁니까?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안 보였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독자에게 달렸고, 내게서 떠난 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삶에서 시는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생활 방편이 됐을 수도 있고, 명예를 가져다 줬을 수도 있겠는데.

    아마 나는 시집이 잘 팔리는 시인 중 하나일 겁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시집을 낼 때마다 팔리는 시인은 손가락에 꼽힐 겁니다. 시집이 팔려 생활에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인세는 대부분 술 마시는 데 썼죠. 젊은 시절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물론 내 시는 예술가로서의 명예욕도 채워주었겠지요.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것에 가장 의미가 있겠지요. 내가 좋아서 시를 썼던 것이지요.”

    선친인 황순원(黃順元) 선생과 박목월(朴木月) 선생 간에 약속하기를, 2세는 서로 장르를 바꿔 시인과 소설가를 시키자고 했다는데. 공교롭게 박목월 선생의 아들인 박동규(朴東奎) 선생과는 이름도 같습니다.

    “박동규 선생님이 언젠가 그런 농담 비슷한 걸 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제가 1938년생인데, 아버님이 박목월 선생과 친교를 맺은 것은 해방 후예요. 그전에는 두 분이 서로 몰랐습니다. 제게 아버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문학은 체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체험을 공유하는 한 집안에서 부자가 모두 뛰어난 문학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삼총사’를 쓴 알렉산더 뒤마와 ‘춘희’를 쓴 아들 뒤마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아들 뒤마는 서자(庶子)였다고 합니다. 제 경우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경쟁과 극복의 대상이었기에, 힘들었지요.”

    ―어떤 식으로 선친을 극복했지요?

    “내 삶 자체로 존재 의미를 가지려면 아버님과는 다르게 살아야 했죠. 아버님이 철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의식적으로 철학 쪽에 심취했고, 또 문학에만 빠져있는 아버님보다 역사류를 많이 읽었지요. 아버님은 기독교 성향이 강했지만, 저는 불교 쪽으로 많이 와있어요. 아버님은 주로 집 안에 계셨고, 저는 떠돌아다니기를 즐깁니다. 아버님과 닮을수록 내 존재의 가치가 없어져요. 비슷한 예술가라면 둘이나 있을 필요가 없죠.”

    ―선친께서 소설을 썼으니까, 일부러 시를 택한 것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소설 쪽에 재능이 있었다면, 아버님과 다른 소설을 썼을 겁니다. 소설가이고 시인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보다는 내 삶, 내 정신세계, 내 인생관이 다른 것이지요.”

    ―말년에 황순원 선생을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제 눈에는 서로 닮은 면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비슷합니까? 비슷한 점은 많겠죠. 그렇지만 생각은 많이 다를 거예요.”

    ―언제쯤 선친의 이름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나요? 세상에서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아니라 ‘황동규의 아버지 황순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요?

    “한 10년 전부터 그랬을걸요. 내 나이 예순이 넘으면서. 그래도 ‘황동규의 아버지’라기보다는, ‘황동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라는 거죠. 과거에는 부자 관계를 묻는 질문이 나오면 좀 불쾌했었어요. 세월이 지나니, 물어보려면 물어봐라 이런 생각이 들어요. 대범해졌어요.”

    따님(황시내)이 소설가로 등단했다는데.

    “소설이 아니고 산문가죠.”

    ―선생이 선친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따님도 선생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렇겠죠. 딸아이에게 문학을 안 시키려고 나도 노력 많이 했어요. 아이는 음악을 듣는 귀가 정확해요. 절대음감을 갖고 있어, 작곡가가 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글 쓰는 쪽으로 돌아왔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왜 문학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죠?

    “아버지의 벽 때문에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걸 자신의 것으로 인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 내 경험 때문에 가능하면 문학을 하지 말라고 말렸지요.”

    ―다시 산다면 시인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사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어요(서울대 문리대 문학부를 수석 입학함). 어머님은 제가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식은 남편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던 거죠. 하지만 며칠 고민하다가 문학을 하겠다고 했어요. 다시 살아도 저는 문학을 할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와의 대화인데, 이를 다른 것과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시와 어떻게 대화합니까?

    “시를 써놓고 그 시와 대화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내가 그 시를 썼지만, 그 시가 말을 걸어옵니다. 대화하면서 내 삶이 그 시를 통해서 깨닫기도 합니다.”

    ―도무지, 시적(詩的)이군요.

    “제가 노안(老眼)이라, 한때 눈(眼) 속에 모기가 나는 것 같은 증상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이를 비문증(飛蚊症)이라고 하는데. 그럴 즈음 가을빛 속에 모든 게 녹는데, 내 눈 속에 나는 모기만 왜 안 녹느냐는 푸념을 하며 이런 시를 쓰고 있었지요.

    ‘…세상 구석구석을 찬찬히 녹이는 황혼,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內臟) 같군, /누군가 말했다. /늦가을 저녁 /나무, 꽃, 나비, 새 들이 그대로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꾸욱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 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그런데 마지막 연에 ‘날건 말건!’이라는 구절을 쓰면서, 깨달았지요. 내 눈에 비문이 보일 때마다 ‘날건 말건!’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겁니다. 그 뒤로는 생각날 때만 모기가 날고 보통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 삶과 시가 이런 식으로 공생합니다.”

    ―40대 말에 70편의 연작시 ‘풍장(風葬: 시신을 지상에서 탈골시킨 뒤 매장하는 장례 형식)’을 썼지요. 그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니, 이제는 죽음에 상당히 달관했겠지요?

    “달관이라기보다는…. 처음 작곡가가 되려고 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베토벤이 56년 3개월쯤 살았으니, 저는 그보다 10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이제 그 바람을 한참 넘어섰으니, 지금 사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덤으로 사니, 죽음에 대해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건강을 지켜 오래 살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한번도 건강을 삶의 목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냥 삶의 수단일 뿐. 한번은 몸이 불편해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 의사 선생님이 ‘나이 들어 건강을 지키려면 평소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계속 주문을 해, 그분을 피해 다녔지요.”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그건 내가 알 수가 없죠.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걸 내가 일부러 알 필요가 뭐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기독교와 불교에서는 모두 다음의 세계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난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생전에 김춘수(金春洙) 시인에게 죽음에 대해 묻자, “절실하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난 그런 것 없어요. 삶이 있는 생물이란 어차피 소멸하는 게 이치인데,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노화(老化)는 계속 진행되고, 늙으면 쓸쓸하고 서글퍼지지 않습니까?

    “늙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줄지만, 저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왔지요. 어차피 혼자 나서 혼자 죽는 것인데. 시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늘 다이내믹해요. 물론 과거보다 기동력과 기억력이 줄었어요. 상상력은 여전히 활발한 편이에요. 하지만 기동력과 기억력이 줄었다는 것은 상상력을 옛날처럼 긴장감 있게 컨트롤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시를 적게 쓰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니, 삶이 어떤 거 같습니까?

    “허무주의자들은 삶을 지겹다고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우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다른 인간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데서 오는 기쁨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삶에는 가치가 있는 것이죠.”

    ―앞으로의 삶에서 바람이 있다면?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좀 더 신선한 대화를 시와 하고 싶다는 거죠. 그게 바라는 거죠. 전보다 더 신선한 대화를.”

    ―가족과의 대화는?

    “자녀들은 다 결혼해 애기 낳고 그랬으니까, 뭐 별로 감흥이 없죠….” 그 순간 시밖에 모르는 시인은 자신이 할아버지라는 점을 비로소 떠올렸다. “손주가 예쁜 것은 빼고. 손주는 정말 예쁘죠.”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 등단 50년… 황 동 규 시인

    조선일보 토요섹션,2008.1.12